아름다운 경영... 0 5 2,380

by 하봉래 정문술 미래산업 기업 사회 [2012.08.12 20:39:26]




한 직원이 뒤통수를 긁으며 사장실을 노크한다.
'사장님. 아들놈 숙제 때문에 상의 좀 드려야겠습니다.'
'숙제?'
'학교에서 아빠 회사의 사훈을 적어오라는데...'
1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래산업>에는 사훈이라는 게 없다.
난감한 와중에도 순간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미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상상하고 창조합니다. 어떤가?'
......

# 탐욕까지 세습하는 사회
내가 <미래산업>의 경영권을 종업원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한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매스컴들은 대서특필을 했다.
하지만 주식회사란 사장의 개인소유물이 아니므로 언제라도 사장은 바뀔 수 있다.
하물며 2세에 경영권을 넘길 권리라는 게 도대체 사장에게 있을 턱이 없다.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했건만 주변은 오히려 소란하다.
모두들 나의 결정이 비상식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은 아닌가.
우리 사회에 그만큼 비상식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세태의 반증이 아닐까.

애달캐달 모은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다고 해서 비난받는다는 건 부당하다.
문제는 자기 재산이 아닌 것을 자식들에게 나눠주려는 데 있고, 일시적으로 위탁된 권력을 가문의 권력인 양 착각하는 데 있다.
권력자의 아들, 사돈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쥔 양 행세하며 이권놀음을 하고, 재계의 거목들은 병석에 누워서까지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속셈을 한다.
하물며 큰 교회의 성직자들은 마치 가업이라도 되는 양 자식들에게 교회를 물려준다.
하지만 역사가 가르치듯이 '세습 권력'은 대부분 실패한다.

우리나라의 창업주들 중에는 입지전적인 인물들도 많고, 그만큼 세인들의 존경을 받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회사를 물려받은 2세들이 선대의 신화를 성공적으로 재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안목 없는 사세확장 등으로 부실경영을 반복하다가 이도 저도 안 되면 편법으로 가산 불리는 일에나 골몰하는 경우도 많다.
선대의 훌륭했던 점은 다 버리고 탐욕과 아집만을 세습하는 대물림이다.

창업주가 전문경영인 체제를 세우고 물러났지만 2세들이 못나게 굴어 선대의 청명한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모든 부자'를 욕한다. 오랜 세월이 심화되고 고질화된 이 사회의 빈부격차가 만들어낸 서글픈 습관이다.
정직하게 축재한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억울하다.
자식들만은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아비들의 소박한 염원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원동력 아니었던가.
하지만 모든 건 정도가 문제다. 이 사회의 '세습'은 징그러울 정도로 집요하고 범죄적이다.
......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어머니의 화장대 앞에 편지를 써두었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아빠 구두 닦은 값 오백 원, 지난 달 산수 시험 100점 맞은 값 천 원, 어제 엄마 심부름한 값 오백 원, 합쳐서 이천 원 주시기 바람.'

이 맹랑한 아들녀석의 책상 위에 어머니는 답장을 쓴다.
'너를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키우며 고통받은 값 무료,
 지금까지 너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켜 준 값 무료,
 지난주에 네가 야구공으로 깬 옆집 유리창 변상한 값 무료,
 앞으로 네가 독립할 때까지 뒷바라지해 주는 값 무료, 아들아 사랑한다.'

아들과 어머니와의 관계는 곧 기업과 사회의 관계와 같다.
기업은 자신이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고, 세금을 냄으로써 사회를 부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업은 늘 사회를 향해 무엇인가를 더 내놓으라고 보채기만 한다.
맹랑하다. 백 개 받은 걸 잊고 한 개 준 값 내놓으란다.
기업에 필요한 인재와, 자본과, 기업행위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는 사회가 길러 주고 사회가 조달해 주는 것 아닌가.

이 사회가 지금껏 나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왔으므로, 떠나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기업하게 해주고, 돈을 벌게 해주고,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으므로, 언젠가는 보은도 해야겠고 효도도 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단순하나마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회환원'의 의미다.
......

열정과 모험에도 정도(正道)가 있어야 한다.
요즘 같은 세태일수록 옳은 길과 삿된 길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와 안목이 더욱 절실해진다.
우리 사회에는 열정적인 사람은 많지만 실패를 책임지는 사람은 적으며, 모험적인 사람은 많지만 도덕적인 사람은 적다.
열정과 모험에도 자격이 필요한 법이다.
......

젊은이들은 '앞'만 보고 가지만 늙은이들은 '앞뒤'를 볼 줄 안다.
이건 일종의 역할분담이다. 이 역할분담이 깨지다 보니 젊은이들은 무작정 코뿔소처럼 달린다.
그러다 제지를 당하면 'Why not!' 하며 눈을 부릅뜬다. '과정'의 의미나 가치는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의 젊은이들에겐 교양과목도, 군대도, 직장생활도, 모두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들이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옛말이 있다.
닳고 닳은 말이지만 얼추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절감한다. 헌데 이 말을 해주는 어른들이 너무 없다.
고루한 늙은이 대접을 받기가 싫은 것이다.
그래선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고난'이나 '역경'이란 아예 적성 개념이다. 그런 것들은 무조건 소소익선이란다.
......

간혹 회사로서는 벅찰 수밖에 없는 엄청난 대우를 요구하는 입사 지원자들이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재들일 뿐더러, 요즘 세상에는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홍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재축에도 들지 못한다니 십분 이해가 되는 태도다.
하지만 그런 인재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을 설득한다.

사주의 욕심 때문만도 아니고, 인력시장에 흔하다는 '협상 수법'도 아니다. 인재를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 때문이다.
'자네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우리 회사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입사를 지원한 거라면 당장의 욕심은 조금만 버려 주게.
꿈으로 남겨두어야 할 몫까지 처음부터 한꺼번에 요구하는 것은 회사뿐만 아니라 자네에게도 별로 득이 될 게 없네.
억지로 미래를 앞당기면 마음도 그만큼 빨리 늙게 마련이네.
믿게 <미래산업>은 절대로 자네 몫을 가로챌 마음이 없네. 다만 그 순서를 지키고 싶을 뿐이네.'
......

얼마 전에 집으로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종합검진을 받으라는 안내문과 함께 검사준비를 위한 몇 가지 약품이 들어 있다.
늙은이들이라고 챙겨주는 건지 아니면 중요 고객이라고 대접하는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덕택에 올해도 잊지 않고 종합검진을 챙기게 될 모양 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버티기 시작한다.

'당신이나 가세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 가! 이 할망구가 또 무슨 병을 얻어걸리고 싶어서 그래!'
나는 호통을 쳤지만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지난 번 수술이 너무 힘들고 끔찍했다는 것이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아, 그러니까 종합검진이라도 빼먹지 말자는 거 아닌가! 큰 병 걸리기 전에 미리 알면 그 고생 안 해도 되고.'
'에이, 싫어요. 이제 병 걸리더라도 병원 안 가고 살 만큼 살다 죽을래요.'
'암 수술 한번 하더니 성불을 했나!'
'이 나이에 병 걸려 죽으나 그냥 죽으나 그게 그거예요. 여럿 귀찮게 하느니 그냥 죽고 말지...'
'우리가 돈이 없어, 자식들이 없어! 그냥 죽긴 왜 그냥 죽어!'
'제가 싫어서 그래요. 얼마나 더 살겠다고 늙은 몸을 또 괴롭혀요.
어느 똑똑한 의사양반이 테레비에서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몸이 늙으면 병이 퍼지는 것도 더뎌진답디다.
암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병이 생기면 악착같이 투병할 생각 말고, 그저 친구 삼아 달래고 어르면서 함께 살아갈 생각을 하라고.'
'얼씨구...'

못마땅한 얼굴로 얼버무렸지만, 나는 아내의 소박한 말솜씨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하긴, 신이 주신 만큼 살다 가면 그만 아닌가.
이 나이에 건강해지면 얼마나 더 건강해지고, 나빠지면 얼마나 더 나빠진단 말인가.
아내로부터 '늙는 방법' 하나를 새로 배운 나는, 병원에서 온 소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이제야 많은 것을 버릴 줄 알게 된 우리 내외에게도 한때는 속수무책으로 번민만 하던 나날이 있었다.
그때도 역시 '모든 것'을 버리려고 했었지만, 지금처럼 평화로운 버림은 결코 아니었다.

그 혹독했던 시절을 동반자살까지 결심하며 나와 함께 버텨준 아내였지만, 나는 이제껏 아내에게 고맙다는 내색조차 한번 해보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미래산업>의 성공에 가장 큰 보탬을 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내였다.
가족들의 삶까지 포기해야 할 만큼 무모하기 짝이 없던 남편을 매일 보면서, 어찌 하고 싶은 말이 없었겠으며 만류하고 싶은 때가 없었겠는가.
아내의 침묵과 순종이야말로 내 모험심과 배짱의 진짜 배후였고 뒷심이었다.



출처 : 아름다운 경영 중에서

by 고기브페 [2012.08.14 10:38:53]
좋은글 잘보고 가요 
훈훈해지내요 ㅎㅎ

by 하봉래 [2012.09.03 21:52:14]

네~
정문술씨 같은 기업인이 많아지면, 우리나라 CEO들도 존경을 많이 받을것 같네요.ㅎㅎ

by 손님 [2012.09.07 12:46:39]

감동적이네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되는 사실?

이런 기업인들이 더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by 터보아이덴티티 [2012.09.07 12:48:34]

으음 위의 댓글을 실수로 로그인하지 않고 작성했네요

죄송해요

by SHK [2012.09.21 10:20:57]

이런 기업인들이 점점 더 많아졌음 좋겠네요...^^; 개인적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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