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직장밖에 몰랐던 생활이었다.
대낮에 갑자기 갈 곳이 있을 턱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집으로 갔다. 마침 아내는 집에 없었다.
나는 옷을 편하게 갈아입고 청계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마흔셋이라는 나이와, 다섯 명의 아이들, 사랑하는 아내,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부담스럽게 여겨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아득하기만 했다.
......
눈앞이 깜깜했다.
패기와 만용을 착각한 결과였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 온전한 내 잘못이요. 실수였다.
매거진이 성공했을 때 차분히 내실을 기하며 단계적으로 기술개발에 힘썼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직원들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직원들뿐만이 아니었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은 나를 믿고 나를 도와줬던 친척들이며 친구들, 끝까지 침묵으로 나의 길을 보살펴 주었던 아내와 아이들에게까지 면목이 없었다.
커다란 벽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순식간에 비관적인 생각들이 나를 온통 지배하기 시작했다.
세상이 어둡게만 느껴졌다. 오십이 넘은 나에게 이제 더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 생각없이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오로지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렇게들 자살을 하는구나 싶었다.
뒤늦게 뛰어든 사업에 실패하고 결국 자살을 택했던 해직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선택을 내가 얼마나 비웃었던가.
......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새벽에도 일어나 식탁에 앉아 소주를 마셨다.
잠결에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났던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멍하니 취하고 있자면 어느새 아내도 일어나 내 옆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몇 주일을 밤낮없이 술에만 취해 있었다. 사무실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관심도 없었다. 회사일이라면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어느 날 새벽, 나는 아내와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놓았다.
'여보, 죽읍시다. 아무래도 방법이 없어.'
의외로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들어서 안 소리지만, 그 다음날 아내는 아이들을 모아놓고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더 끔찍한 일은, 아이들 모두가 그 말에 동의를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죽을 궁리를 시작했다. 아이들만 남겨둘 수도 없으니 일가족 동반자살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무렵 TV를 보다가, 강원도 어디쯤에서 승용차를 타고 가던 일가족이 벼랑에서 떨어져 몰살했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나에게는 포니 한 대가 있었다.
식구는 많고 차는 작아서 문제가 좀 있겠지만, 한 가족이 자살을 하기에는 그 방법이 가장 그럴 듯하다고 여겨졌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물에 빠지면 틀림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물 속에서 고통스러워할 아이들을 상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청산가리였다.
아내의 먼 친척되는 양반이 전 재산을 탕진하고 청산가리로 일가족 동반자살을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산가리를 어떻게 구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알 방도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죽을 마음까지는 없었던가 보다.
우습게도 죽지 못할 이유가 참 많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수면제를 모아보기로 작정했다.
당시 우리 식구가 잘 가던 서초동 우성아파트 단지내 우성쇼핑센터에 약국이 하나 있었고 그 주변에도 약국이 두어 군데 있었다.
수면제를 달라고 하면 내주는 것이 고작 서너 알이 채 안 되었다.
근 한 달간을 약국에 들락거리면서 수면제를 겨우 한 병 가득 모았다.
그래봐야 우리 일곱 식구가 모두 죽기에는 턱없이 모자를 양이었다.
별 수 없이 나 혼자라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소주 한 병과 수면제를 챙겨들고 청계산을 올랐다.
정상에 올라와 보니 강남 일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였다.
비정한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어째서 나 혼자만 이렇게 비참해져야 하는 건지 문득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갑자기 무너져내려서 모두가 같이 죽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전쟁이라도 나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졌으면 하는 못된 생각도 했다.
소주병과 약병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한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희망 같은 것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가 죽으면 나를 믿고 도와줬던 사람들은 뭐가 되는가.
내 가족들은 또 뭐가 되는가. 무작정 살다보면 항상 어떻게든 길이 생겨나지 않던가.
이런 생각들이 갑자기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대로 실패한 인생으로 마감되긴 싫었다.
잃었던 오기도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무조건 잃어버린 것만은 아니다.
실패는 했지만 아직 기술은 남아 있지 않은가.
기계설계, 전자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제어계측, 진동.소음제어, 정밀온도제어, 현미경 연동제어, 색채식별, 정밀위치제어, 특수모터제어, 에어베어링, 정밀기계 분야 등등에 관한 우리의 기술력만큼은 국내 최고라 할 만했다.
자그마치 4년 동안 18억을 쏟아부어 가며 축적한 기술을 이대로 흩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퍼 검사장비' 따위는 이제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개발해서 팔 수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산 아래를 향해 있는 힘껏 약병을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뛰듯이 산을 내려왔다. 늦은 오후였다.
나는 서둘러 차를 몰아 사무실로 달려갔다.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직원들이 지레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뛰어들어온 나를 보더니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짐짓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망하기라도 했냐! 얼른 짐들 못 풀어!'
근 한 달 만에 나타난 사장치고는 목소리가 좀 컸던 모양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시 해보자구. 다른 걸 만들면 될 거 아냐. 기술은 뒀다 어디 쓸 거야, 제기.'
나의 갑작스런 말에 직원들은 당황한 눈치였으나, 곧 내 의도를 알아채고는 묶었던 짐들을 다시 풀기 시작했다.
비로소 내 눈에 내가 책임져야 할 일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부담감이 싫지 않았다.
......
나는 지금도 대기업을 자주 들락거린다.
'협력업체'의 사장이 해야 할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기업 사람들 하는 모양을 보자면 기가 막힐 때가 많다.
대기업의 과장이나 부장쯤 되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협력업체 사장들을 아주 내려보는 버릇이 있다.
'당신네 회사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번 인사는 좀 문제 있지 않았어?' 하는 식으로 내정간섭까지 하려 든다.
그런 어이 없는 충고 앞에서 우리네와 같은 협력업체 사장들은 감지덕지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수밖에 없다.
협력업체의 생사존망이 오로지 그들의 심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대기업의 부장쯤 되는 사람들은 우리 회사로 전화를 한다.
이미 환갑을 넘은 나한테 전화를 해서는 온갖 잘난 척을 하며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아저씨뻘 되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실없는 농짓거리를 할 수 있는 배포가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기업에서 간부노릇 정도 할 사람이면 어려서부터 모범생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일류대'에서 착실한 엘리트 수업을 받아왔을 것이다.
사회에 나와보면 이미 앞서간 그들의 선배들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겁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가서 선배들이 마련해준 길을 또한 착실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자기 앞에 와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무서운 줄을, 사람이 무서운 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들의 거드름과 권위주의는 사회에서 키워 준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정리해고라도 당할라치면 한강밖에 갈 곳이 없다는 소리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세상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험난한 세상에 내팽개쳐져서 도대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겠는가.
......
기업문화란 직원들이 가장 즐겁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무형의 환경을 뜻한다.
리더는 직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모색하고 구축해갈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모험이라는 것이다.
직원들을 자유롭게 풀어두자니 간부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이 불안과 초조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결국 기업문화는 사라지고 기형적인 관료조직만 남는다.
관료조직은 속성상 보다 견고한 관료조직을 모방한다. 악순환이다.
......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직장에서 보내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 시간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Golden Time of Golden Age'인 것이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가정과 휴양을 위해 쓰고 마지막 삼분의 일은 잠을 자면서 보낸다.
흔히 직장을 생계유지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쓰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삼분의 일이 불행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시간대를 우리는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
직장에서의 기분이 거의 하루의 컨디션을 지배한다고 봐야 한다.
직장생활은 그만큼 중요하다.
......
나는 엔지니어와 예술가를 곧잘 비교한다.
흔히 한쪽은 두뇌를 상징하고 다른 한쪽은 감성을 상징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둘 다 '선(先)감성, 후(後)두뇌'라고 말하고 싶다.
기억력이 좋고 계산능력만 탁월한 것은 예술가들뿐 아니라 엔지니어들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양쪽 모두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열정이다.
이 세 가지는 두뇌라기보다는 감성의 영역이다.
......
타고난 재능과 모험적 기질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진실과 성실의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정의와 끈기가 뒷받침되지 않는 재능이란 반짝 빛났다가 영구히 사라지는 폭죽 같은 것이다.
일시적인 찬란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엉뚱한 창의력을 신뢰하는 만큼이나 우직한 성실성을 믿는다.
일하는 자의 행복을 아는 사람만이 좌절하지 않는다.
결과보다는 과정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컴퓨터의 순차적인 동작과 그 움직이는 원리를 관찰하며 감탄했다.
창의력이 발생하는 방식과 그 컴퓨터가 움직이는 방식은 같다.
매순간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정보와 착상들은 차마 집계하고 인식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갈고리를 준비하는 일이다.
우둔한 끈기와 정확한 방향으로 세팅되어 있는 긴장.
그리고 그 긴장상태를 오랜 시간 유지하는 힘.
하나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수백, 수천 시간의 우직함이다.
아이디어도 끈기인 것이다.
출처 : 왜 벌써 절망합니까 , 나는 마흔 셋에 시작했습니다 중에서...